“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야고보서1:12)
하나님께서는 시험을 참는 자를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시험을 참는 자는 약속된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시험을 참기 위하여 시련을 견디어 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약속하셨던 생명의 면류관을 얻기 위하여 끝까지 견딘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마귀의 유혹으로부터 시련을 견디면서 ‘쉬운 일’을 하기보다는 현재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있는가를 항상 먼저 생각해 봐야 합니다.
13절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사람의 시험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시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14절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시험은 자신의 욕심으로부터 옵니다. 그 욕심은 죄를 불러일으키고 죄는 결국 영혼의 타락을 일으킴으로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욕심을 따라 살게 되면 영원한 사망에 이를 것이지만 시험을 견디는 자는 영생에 이를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기록한 로마서의 두 마음과 연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려는 마음과 육신의 마음사이에 갈등을 바울도 언급하였습니다.
(로마서 7:25)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16절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속지 말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속지 말라는 말씀인가요? 그것은 육신의 미혹을 속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말씀의 순종은 약속된 ‘생명의 면류관’(12절)을 받기 위함인 것을 항상 염두 해 두고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야고보서는 구원의 개념을 두 가지 법의 대립을 이용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빌2:12의 말씀처럼 보는 사람이 있든지 없든지 말씀에 복종하는 것은 항상 옳은 일이므로 스스로 주님의 심판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해 본 뒤에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빌립보서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아담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선악과’ 앞에서 갈등하는 ‘시험’을 통과해야 했듯이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서 세상에서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와 ‘유월절’을 경험했더라도 ‘광야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가나안에 들어 갈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 시험은 약1:14말씀처럼 ‘자신의 욕심’과의 싸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인지 아니면 욕심에 이끌려 마귀의 유혹을 받을 것인지를 선택하는 과정을 하나님이 지켜보게 되신 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험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께도 적용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을 시험받은 것처럼 예수님 또한 광야에서 마귀에게 40일동안 시험받으셨습니다.
이러한 과정이 동일하게 반복되는 이유는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난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항상 순탄한 일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알려주려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 있는 이기심과 욕심으로 하여금 언제든 돌변할 수 있는 상황이 올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험’에서 이길 유일한 방법을 약1:17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17절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오는 ‘성령의 은혜와 은사’로 이겨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후 사역하시는 동안 기도로 모든 시험을 이기시고 십자가상에서 구원을 완성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똑같이 ‘연약한 육신’을 입고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약속된 예언’을 이루시기 위하여 ‘성령’과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또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세상을 이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으로 ‘약속된 주님의 지상명령’을 이루기 위하여 파송 받은 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지상명령 성취를 이루기 위해서 ‘자신과의 시험’을 이기며 ‘성령 충만’으로 약속된 ‘면류관’을 얻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이란 단어는 회전하는 그림자조차 없다는 표현과 일맥상통하는 단어입니다. 모든 죄악의 모양을 성령의 충만함으로 이겨 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8절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곧 ‘예수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우리를 ‘양자’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구속하여 하나님의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빛의 자녀’입니다.
19절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20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모든 악을 버리고(시험을 이기고)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야 합니다. 온유함으로 받는 다는 것은 성령으로 받아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으로 받지 않고는 시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그래야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22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성령께서는 듣기만 하는 믿음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자신을 속이는 일일 뿐만 아니라 심령이 무뎌짐으로 자신의 인생 또한 속은 상태로 죄악 중에 살 수도 있음을 경고해 주는 말씀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죄인인지도 모른 채 구원받았다는 착각 속에 삶을 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해방시켜주신 것에서 벗어나 ‘마귀의 편’을 들게 되면 자신이 다시 ‘마귀의 종’이 된 것을 모른 채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23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실 때 어떠한 차별 없이 용서하신 것과 같이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차별 없는 저주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말씀과는 멀어진 육신적인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거울을 보는 것은 육신을 보기 위함인데 육신만을 보게 되면 영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육신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보지 않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을 지는 몰라도 그 얻은 것들을 내세에 가져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는 믿음이 없이 살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25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본문은 예수그리스도가 죄인을 자유롭게 한다고 말씀하지 않고 ‘온전한 율법’이 자유롭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https://good-friend.tistory.com/37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불완전한 율법을 온전케 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듣기만 하여 잊어버리는 사람은 모든 일에 저주와 고난이 있을 것이고, 이 율법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은 그 행하는 모든 일에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택하는 사람이 아니라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을 택하는 사람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이 경건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특정한 사람이 경건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특정한 사람은 정직하게 행하여 자신의 마음과 혀를 제어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온전한 율법을 주야로 묵상함으로 영적 분별력과 감각을 잃지 않고 영적싸움에서 승리하여 경건에 이르고자 힘쓰는 사람입니다.
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야고보서는 진정한 경건에 대하여 정의할 때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서 돌보는 사람이 경건한 자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고아와 과부는 (신명기10:18)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책임져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책임져 주시는 방법은 율법의 테두리 안에서 보호받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를 돌보신다는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잘 지키게 되면 고아와 과부가 안전하게 보호받게 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것은 그 율법 속에 비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야고보서는 이방인들을 위하여 쓴 서신서가 아니라 율법을 이미 잘 알고 있는 유대인 기독교인들을 위하여 쓴 서신서라는 것을 더욱 잘 알게 해 줍니다. 야고보는 불순종으로 인하여 폐기된 율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온전한 율법으로 탈바꿈되어 지는가에 대해 기록한 서신서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소외된 고아와 과부들 까지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보아야 되는데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그 모든 하나님의 뜻을 깨달음으로 온전한 율법을 행할 수 있게 성령께서 성화시켜 가신다는 의미를 전하고자 한 것입니다. 율법이 폐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이 온전케 되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은 율법으로부터 떠난 영혼은 세속에 물들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영혼이 세속에 물들었다는 의미는 이미 하나님의 율법을 멀리함으로 저주의 구덩이에 스스로 빠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야고보서는 무엇보다도 자신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구원과 자신을 지키는 것과의 관계가 전혀 무관한 관계가 아니라 밀접하게 상호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원과 자신을 지키는 것의 관계는 무엇이기에 이렇게 강조하는 것일까요?
야고보서는 ‘구원’이라는 개념을 천국이라는 공간적 개념이 아닌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임을 알리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구원이라고 역설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현재 죄로부터 지배받고 있는 사람이 누구나 죽어서 공간적인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오히려 예수그리스도를 속이고 있으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 말씀합니다.
야고보서는 경건하고자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야말로 그 믿음의 시련으로 인해 당장은 고통가운데 있다고 할지라도 인내하여 마침내 결실을 맺는다면 그 사람은 모든 것이 구비되고 온전하게 되어 결단코 넘어지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넘어지지 않는다는 말은 반석과 같다는 의미이며, 반석과 같다는 뜻은 그 믿음이 바로 ‘구원받는 믿음’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구원받는 믿음’은 곧 말씀을 행하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험이나 고난이나 시련이 온다고 할지라도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이기에 현세나 내세에서 통용되는 영원히 구원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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