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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

믿음은 힘을 다해 싸워서 지키는 것입니다.(유다서1:1-4) 강해설교: 김정국 목사

by jk-kim 2021. 10. 29.

우리는 야고보서에서 흩어진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 당부했었던 내용을 기억합니다. 그로 인해 세속에 물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배출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유다서도 그와 같은 맥락의 말씀으로 시작을 합니다. 거짓 선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왜 비슷한 전개로 시작할까요?

그 이유는 야고보 저자를 제일 잘 아는 저자가 바로 유다이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야고보의 친동생입니다.

(마13:55)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유다 또한 형 야고보와 마찬가지로 처음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았다가 나중에서야 믿게 된 인물입니다. (막 3:21)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나중이었을지라도 먼저 믿은 사람들의 모범이라 평가받습니다.

기독교 전승에 의하면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이었던 야고보유대전쟁 발발 직전 산헤드린 공회에서 돌에 맞아 순교하였고, 유다시리아(팔레스타인 위쪽)와 메소포타미아(이라크) 등지에서 시몬 베드로와 함께 설교하였다가 페르시아(이란)에도 가서 설교하던 중 창에 맞아 순교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좌)야고보서와 유다서 수신지역으로 예상되는 레바논(팔레스타인)시리아, 이라크와 페르시아(북동쪽) 지도 - (우)야고보,시몬,유다가 선교활동을 하였던 비옥한 초승달지역(팔레스타인, 시리아, 이라크, 이란)

유다서가 왜 베드로후서의 구절을 자주 인용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 역사입니다. 그가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등지에서 베드로와 동행하며 설교했던 적이 있었기에(https://blog.naver.com/jk9892/222808912781) 학자들은 누구보다 시몬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라 추리합니다.

 


※ 유다서와 베드로후서에 등장하는 유사구절입니다. 

① 거짓 선지자(벧후2:1-3; 유1:4)
② 범죄한 천사(벧후2:4; 유1:6)
③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벧후2:6; 유1:7)
④ 천사와의 비교(벧후2:6; 유1:7)
⑤ 발람의 길(벧후2:15; 유1:11)
⑥ 물 없는 샘(벧후2:17; 유1:12)
⑦ 사도의 발을 기억할 것(벧후3:2; 유1:17)
⑧ 기롱자(벧후3:3; 유1:18)


유다는 왜 흩어진 팔레스타인 지역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하게 되었을까요?

3절...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오늘날 유다서가 있게 된 이유는 믿음이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출발이 되었습니다.(3절) 예루살렘 교회 감독이자 자신의 형제 야고보가 순교하면서 그들을 돌볼 지도자가 마땅히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믿음이 식어지는 것을 본 유다는 안타까운 마음에 그들에게 편지하고픈 마음이 간절해진 것입니다. 성령께서도 유다의 그 마음을 알고 계셨으므로 그에게 목자의 심정을 허락하셔서 그들을 향해 편지를 쓰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한 사명은 영혼에 대한 작은 관심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들에게 어떤 문제가 있었을까요?

(유다서 1:4)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그들은 단번에 받은 구원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있었습니다.(3절)
그들은 한번 받은 구원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구원이 운명적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주께로부터 받은 믿음을 위하여 힘써 싸워 지킬 필요가 있음을 설명해 주고자 했습니다.

즉, 믿음을 자신 스스로 지켜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은 왜 지켜야 하는 것일까요?

(유다서 1:4)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공동체에 가만히 들어온 몇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4절) 그들은 거짓 선생들입니다. 그들은 영적인 지식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영은 신령하기 때문에 그 지식으로 가득 차 있으면 영혼은 구원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교리를 공부하여 마스터하면 영혼이 구원받게 되는 원리입니다. 영에 관한 방대한 지식이 구원을 견인하는 것이죠.
그들은 또 육체는 본성상 연약하고 악할 수밖에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연약한 본성을 가진 그리스도인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서든 그들의 행위와 관계없이 강권적으로 구원해 주신다고 가르쳤습니다. 구원이 이미 정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행동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구원에 이르도록 강권적으로 섭리하시기에 하나님의 자녀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된다는 논리입니다.

이것은 예정론의 중요 개념인 ‘이미 와 아직’ 중에서 ‘이미’란 개념은 이해하였는데 ‘아직’이라는 개념을 혼동한 것과 유사합니다.
어떤 행위를 해도 하나님께서 본인을 돌이키실 것이라 믿고 방탕함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방탕함으로부터 이미 구원을 받았는데 그 죄의 세력에게 붙잡혀 돌아가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자신의 죄를 정당화시키는 오류를 낳습니다.
연약하다는 이유로 신의 섭리 속에 그 책임을 떠 넘겨 버립니다. 그것이 반복되고 죄악으로 인해 영혼이 오염되면 죄가 세상에 점점 만연해지게 되는데 그 결과로 많은 피해자들이 발생합니다. 이 문제들은 세상에 다양한 현상들을 일으키죠. 간음, 사기, 횡령, 이혼, 부정부패, 포학, 협박, 따돌림, 자살 등의 현상들입니다. 그 가르치는 교리로 인해 말세의 현상이 부추김 받습니다.


이러한 결과들은 세상이 갑자기 악해져서 일어난 다기보다는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스스로 미지근한 신앙생활에 만족함으로 알게 모르게 세상의 말세를 만들어가는 주체로 전락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런 선생들이 공동체 안에 숨어있다고 말씀합니다. 오늘날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 시대 또한 이단들에게 양도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유다는 바로 이러한 문제들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 힘써 싸우라고 한 것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악의 세력은 더 교묘해지고 강성 해지는 반면에 교회 속의 그리스도인들은 아직도 대비하지 않으면서 주님의 손에 맡긴다는 명목 아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은 더욱더 악해져 가고 교회의 크리스찬들도 이단의 계략에 속수무책 넘어가는데, 변절의 책임을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해석하여 안이한 대처를 한다면 이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요? 주권이란 단어가 언제부터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도구로 쓰였습니까?


(유다서 1:4)“...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본문에서는 거짓 교사들의 세 가지 특징을 말씀합니다.(4절)

그것은
첫째, 경건하지 않다는 것
둘째,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한 것으로 바꾸었다는 것
셋째, 그리스도를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첫째, 경건하지 않다는 것은 지옥 판결을 받은 자와 같습니다.(4절)

(유다서 1:4)“...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이것은 구원이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암시해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경건과 관련 없는 가르침이라면 수정하여 가르칠 필요가 있는 것이죠.

둘째,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한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이것은 삶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효과를 경험하지 못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주는 효과는 방탕함으로부터 경건함에 이르는 변화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인데 도리어 죄의 세력에 사로잡혀 버리게 된 현상은 그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가르침이 잘못되었기에 신앙의 교정이 필요한 상태인 것이지요.

셋째, 그리스도를 부인합니다.

크리스천이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한다는 뜻은 이전의 죄악 된 삶으로부터 주님께서 해방시켜 주셨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 교사들은 천국을 위해서는 선택적으로 시인하고 핍박이 올 때는 그리스도를 부인하여 상황에 따라 실익을 챙기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말씀(진리) 보다 돌아오는 이익이 더 중요한 가치가 됩니다.)
(마태복음 26: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핍박과 같은 특수한 환경에서 최종 결정이 되기도 합니다. 인간의 이기심이 발동하기 가장 쉬운 순간들입니다.
이러한 배신은 세상의 부나 권력, 생명 같은 문제이거나 혹은 절호의 기회라 여겨졌을 때, 빈번히 발생합니다. 다른 영적 지도자들은 그들의 믿음을 위해 순교를 택하는데 이들은 이것을 기회로 여겨 남은 교인들의 목회자가 됩니다. (우리나라의 신사 참배 역사와 유사하죠.) 역사적으로 이들 지역은 결국 이슬람권 지역으로 넘어갑니다. 터키지역과 함께 이 지역을 성령께서 강권하신 이유가 있었던 것이죠.
끝까지 싸우지 못해 회교권으로 넘어간 지역입니다...


사회에서도 친했던 친구가 갑자기 배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배신을 하겠습니까?

냉정한 현실 앞에서 실리적 결정을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여 성령을 받은 자들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유다서는 영적 전쟁이라는 힘의 원리를 기반으로 기록된 서신서입니다.
이러한 원리를 알지 못하면 정말 이해하기 힘든 서신서입니다.


현재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영적 싸움은
천상에서 발생하고 있는 영적 싸움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현재 구원을 둘러싼 상반된 교리가 상충하는 현상에 대해 우리는
천상에서 일어나는 영적전쟁이라 읽으면서,
지상에서 일어나는 목회자들 간의 신경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다는 이 싸움에서 지게 되면 구원을 잃게 될 수도 있다고 이해하였습니다. (3절)
왜냐하면 그들이 구원에 대한 '프레임'을 씌우게 되면 벗어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양들은 목자들이 가르친 대로 따라가기 때문에 그릇된 길로 인도하면 함께 멸망의 길로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구원의 프레임에 갇힌 사람들의 특징을 설명합니다.
그것은 죄와 싸워서 이기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3절)

(히브리서 12:4)"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영적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면 죄악의 본성들이 다시 수면으로 올라오게 됩니다.
그래서 유다서는 특별히 과거에 심판을 받았던 육에 속한 사람들의 목록을 열거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유다는 시간을 초월한 악한 본성의 패턴이 현재에도 재현될 것이라 이해한 것입니다.
(해리포터에서 볼드모트와 그의 추종자들을 기억해보세요. 그들은 살아난 볼드모트에 대항하지 않고 힘의 원리에 의해 추종자들이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연약하다는 것을 아는 것보다 진정 그들이 대항하는 용기가 없어서 추종자가 되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구원에 관한 지식이 중요했던 게 아니라 처음부터 '용기'가 중요했던 것입니다.)

(삼상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그렇게 영적전쟁에서 지게되면 육신의 죽었던 본성이 되살아나는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과거에 육에 속한 사람들이 심판받은 것처럼
미래에도 그와 동일한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유다를 통해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의 목록을 나열하여 설명해 주시면서 이러한 불법으로부터 돌아서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목록과 겹치는 자는
천상의 생명 책에서 자기 이름이 남아있으리라는 기대를 빨리 버리는 것이 낫다는 종말론적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니, 이제부터는 싸워 이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계 2:26)"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결국 계시록에 나오는 터키지역과 함께 이들 지역이 회교국가가 된 것은 참 맛을 내는 소금의 양이 결정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당시 믿음을 위해 더 철저하게 싸웠더라면 오늘날의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이처럼 유다서는 믿음에 대해 바라보는 당시의 관점이 후대에
어떤 결과로 나타나는지에 대한 깨달음과 경고를 주시려고
유다를 통하여 계시하여 주신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믿음의 현주소는 어떤가요?

 


우리들은 오늘
죄와 싸우기 위해 분투하고 있습니까?

https://youtu.be/gGicn573Ua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