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저자: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 야고보는 야고보서의 저자이면서 예수님의 형제입니다. 야고보는 처음에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죽음 후 부활을 통하여 비로소 믿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야고보서이해하기 참조) 유다 역시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형제라 하지 않고 야고보의 형제라 칭한 것입니다.
2. 개요
유다서는 ‘신약성경 중 가장 이해되지 못하는 책’이라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Van Houwelingen, 2 Petrus en Judas, 109) 많은 구절들이 베드로후서와 유사한 내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베드로후서의 요약판’으로 취급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리게네는 “유다가 몇 줄 안 되는 서신을 썼으나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로 강한 말씀들이 가득 차 있다”고 하였습니다.(이순한, 공동서신.440)
※ 베드로후서와 유다서의 유사구절
① 거짓 선지자(벧후2:1-3; 유1:4)
② 범죄한 천사(벧후2:4; 유1:6)
③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벧후2:6; 유1:7)
④ 천사와의 비교(벧후2:6; 유1:7)
⑤ 발람의 길(벧후2:15; 유1:11)
⑥ 물 없는 샘(벧후2:17; 유1:12)
⑦ 사도의 발을 기억할 것(벧후3:2; 유1:17)
⑧ 기롱자(벧후3:3; 유1:18)
유다서는 많은 학자들에게 주목받고 있지 않은 책입니다. 왜냐하면 유다서가 모세승천기(9절)와 에녹서(14,15절)를 인용한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유다서는 교회에 있어서 현재 나타나고 있는 문제들을 초자연적 영계의 사건과 연관시켜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다서에는 천사(6,9절)와 마귀가 등장하고(9절), 그들 사이의 영적 싸움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교회 현실에서의 문제들을 초자연적, 영적 세계와 연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연관시키는 것은 요한계시록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과 유다서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미래에 있을 일들의 의미를 초자연적이고 천상적인 이미지를 사용해서 설명하고 있는 반면, 유다서는 지상 교회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의 의미를 초자연적, 영적세계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고 있나요? 우리의 신앙생활이 초자연적이고 신비스러운 부분과 자연스럽고 평범한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유다서가 말하는 바와 같이, 이단이 우리를 유혹하고 우리가 그들의 정체를 알아보며 그들을 거부하는 이 모든 일들이 사실은 범우주적 영적 전투의 일부라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일상생활 가운데서 그것을 인식하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의 일상적 대화나 결단, 그 모든 것 하나하나가 우주적 의미를 지니고 있고 초자연적, 영적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엡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21절) 우리의 싸움은 영적 세력들 사이의 싸움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고, 우리가 성령안에서 기도하며 기다린다면 하나님은 능히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궁극적 구원에 이르게 하실 것입니다.(24절)
유다서의 메시지를 한 마디로 말하면 ‘나는 존귀한 자’입니다. 나는 그분의 관심의 대상이요 사랑의 대상이고, 나의 지상에서의 삶은 초자연적, 영적 전투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3.유다서의 특징 및 저작시기
1) 베드로후서와의 관계
유다서와 베드로후서는 대단히 많은 병행 본문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가 먼저 기록되고 유다서가 이를 참조했거나, 아니면 그 반대일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에 따라 전자에 대한 설명의 근거만 설명합니다.
(벧후3:2-4)“곧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유1:17-18)“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 베드로후서 우선설 근거
① 베드로후서에서 등장했던 재림에 대한 언급들을 유다서에서 생략해버린 것은 예수님의 재림 지연이 후대의 교회에서는 초기의 교회에서처럼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유다서는 후대의 상황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② 베드로후서와 유다서에는 모두 ‘기롱하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기롱하는 자들’(empaiktai)라는 단어는 신약 가운데 이 두 군데에만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양자 중 한쪽이 다른 쪽을 인용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자신을 사도로 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유다가 17절에서 ‘사도들의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라고 했을 때 베드로후서를 염두에 두고 그것을 참조했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Van Houwelingen, 2 Petrus en Judas, 19) 그러나 이것 역시 ‘베드로’ 한 사람을 지목하기 보다 ‘사도들’이라는 복수를 지목했으므로 베드로후서라기보다 사도들의 공통적 전승을 가리킬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왜 그런 일반적인 자료가 베드로후서와 유다서에서만 발견되느냐의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따라서 유다가 베드로후서를 참조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봅니다.
2) 야고보서와의 관계
유다서는 야고보서와의 긴밀한 관계를 보여줍니다. 우선 내용적으로 유사한 부분이 많습니다. 유다서 1:16과 야고보서3:1-10, 유다서1:19과 야고보서 3:15, 유다서1:16과 야고보서2:1-9, 유다서1:23과 야고보서 5:19-20 그리고 저자가 자신을 ‘야고보의 형제’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도 두 서신들 사이에 어떤 특별한 관계가 있음을 추측하게 합니다.
3) 저작시기
야고보는 왜 두 번째 편지를 써 보내지 않고 대신 유다가 서신을 써 보냈을까요? 만약 유다서를 기록할 당시에 야고보가 살아 있었다면(야고보는 AD62년에 죽었다) 야고보는 아마도 여러 가지 상황 때문에 서신을 기록할 여유가 없었을 것이고, 그 대신 유다가 책임을 떠맡게 되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유다가 자신의 형제 야고보가 죽은 직후에 이 편지를 썼을 수도 있습니다. 야고보가 죽었기 때문에 야고보서의 뒤를 이을 서신을 그가 직접 쓸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책의 저술 시기를 AD70년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Van Houwelingen, 2 Petrus en Judas, 117)
4. 유다서의 에녹서 인용문제
유다서1:14-15과 평행구로 분류되고 있는 에녹서 1:9은 쿰란문헌 가운데 존재합니다. 이 에녹서는 쿰란 네 번째 동굴에서 나온 쿰란문헌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쿰란 공동체는 AD66년에 유대 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로마 군대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따라서 쿰란문헌은 그 시기 이전의 작품들입니다. 그러나 에녹서는 정경이 아니라 가경으로 분류됩니다.
이 문제에 관하여 찰스(Charles)는 유다가 문제의 가경들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책들이 독자, 특히 대적들에 의해 높이 평가받고 있는 책이었기 때문일 것으로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경을 인용함으로써 자신의 논의를 더욱 설득력 있게 만들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서 본문을 자세히 읽어 보면 독자뿐만 아니라 기자 역시 가경들을 높이 평가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인간 역사에 미친 천사들의 영향력에 대한 부분에 있어서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난감하긴 하지만 유다서가 에녹서를 인용했다는 사실 자체는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유다서에 인용된 에녹서의 권위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과연 에녹서는 당시에 어떤 권위가 있었을까요?
유다 당시에 에녹은 선지자로서 높은 권위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바나바의 편지’는 어떤 발언에 대해 에녹의 이름을 분명히 밝히고 있고(4:3), 에녹서를 인용하고 있습니다.(16:5) 또한 터툴리안은 에녹의 말을 재림에 대해 권위를 가진 문서화된 예언으로 간주했으며, 그 예언은 에녹에게서 나온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에녹의 예언은 노아에 의해 전해졌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서는 이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Van Houwelingen, 2 Petrus en Judas, 124)
그러나 에녹서를 정경으로 취급한 것은 아닙니다. 유다서 또한 ‘경에 이르기를’이라고 구약 인용하듯이 인용하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에녹서는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에게 상당히 권위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뿐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가 에녹서 전체를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야고보서가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을 위한 서신서였으므로 그들이 권위있다고 인정하는 에녹서를 메시지 전달을 위해 적절히 인용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를테면, 바울도 크레타 출신의 철학자 에피메니데스(Epimenides)의 말을 인용하지만 (행17:28; 딛1:12) 그의 말을 정경과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설명해 줄 수 있는 다리 역할로서 에피메니데스의 말을 인용했을 뿐입니다. 유다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Van Houwelingen, 2 Petrus en Judas, 123)
(행17: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딛1:12,13) “12그레데인 중의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하니 13이 증언이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그들을 엄히 꾸짖으라 이는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하게 하고“
그렇다면 유다는 왜 그 많은 가경들 중에서 에녹서를 인용했을까요?
에녹은 그 당시 인간의 죄가 정점에 달했을 때 심판을 예언했고, 그의 예언대로 그의 증손자 노아의 때에 홍수가 임했습니다. 지금 유다는 독자들에게 세상의 죄악으로 인해 닥칠 심판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 심판의 확실성을 강조하기 위해 유다는 에녹의 시대를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Van Houwelingen, 2 Petrus en Judas, 123)
어거스틴도 에녹서의 일부분이 신적 기원을 가졌음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에녹서의 모든 부분이 에녹 자신으로부터 온 것임은 확실하지 않으며, 에녹서 전체가 정경으로서의 권위를 갖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신의도성,15:23)
유다서에는 에녹서처럼 모세승천기가 인용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위의 논의에서는 본보기로 에녹서의 경우를 집중적으로 추적해 보았습니다.
결론: 유다서에서 이 둘은 권위를 가진 것으로 인용하고 있으니 그 해당 구절들의 영감성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에녹서’와 ‘모세승천기’ 전체에 영감성을 부여해 줄 필요는 없습니다.
출처: 설교자를 위한 공동서신강해 김병국(백석대 기독신학대학원),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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