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4:16 에서“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구원의 행위와 선언은 단번에 이루어지는데 우리의 구원사역은 단번에 끝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새로워지는 과정은 구원사역의 시스템에 의존되어 있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시스템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하이델베르크 80문의 보조설명인 20문은 참된믿음과 연관되어 있는데 그것은 순전한 은혜로 주신 진리와 성령님께서 주신 굳은 신뢰이다라고 답변하고 있습니다. 어렵지요.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알아들을 수 있다면 신학교 가시기를 추천드립니다. ㅎ
성경에서 보면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구원의 행위와 “너는 구원받았다” “너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야” 라고 선언은 매우 강력하게 되어 있지만 우리는 세상에 영향을 미칠만큼 별로 강력하다고 느끼지 않고 있어요. 예수님의 사역은 강력한데 말이죠. 아마도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그 능력이 강력했을거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18문에서 중보자되신 예수님은 참하나님이시면서 참인간이시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학적 용어로 하나님의 신성을 가지신 분이 아기 예수로 태어난 순간부터 사람과 유사한 본질이 아니라 동일 본질이시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해롯을 피해서 베들레헴에서 애굽으로 갔다가 다시 시골인 갈릴리 나사렛에서 와서 사시게 됩니다.
우리와 똑같이 연약한 인간이 되신 거예요. 비하하셨다. 다른 것이 있다면 타락한 본성을 가지신 것이 아니라 죄가 없으신 신성을 가지고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눅 2:52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키가 성장했을 뿐 아니라 지혜도 자라나셔야 했다 라는 의미입니다.
처음부터 지혜가 온전하신 것이 아니었다 라는 거예요. 이 말씀은 아기일때는 아무것도 모르다가 우리와 같이 알아가는 상태이셨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예로 예수님이 청년때에 20-29살 정도 되는 한창 나이에 사역을 시작안하셨다라는 것입니다. 왜 안하셨을 까요?
하나님의 때가 될 때까지 기다리셔야만 했던 거예요. 그것은 그 나이 때에 아직 준비가 안되셨다는 의미도 포함합니다.(참고로 제사장의 사역은 30살이 되어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사역하실 때에 철야기도 후 피곤함을 달래기 위해 배에서 잠을 주무셔야 했고 십자가를 지실 때 체력이 고갈되어 구레네 시몬이 대신 져야 하는 상황도 발생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연약한 육신이었다는 것을 상세히 알려주고 있어요.
왜 성경은 이렇게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모든 시험을 이기고 사역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도가 필요하였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4:2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나아가 예수님은 전능하신 신이신데도 불구하고, 왜 밤이 맞도록까지 기도하셔야만 하셨을까?
예수님은 연약한 육신으로 40일을 금식하시고 성령에 이끌리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역의 모범을 보여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예수님도 주님의 사역을 위해서는 반드시 테스트가 필요했다 라는 것입니다. 아담의 실패한 예와 비교해 연약한 육신을 입은 아들 예수가 성공한 예를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들이어도 예외없이 테스트는 필요한것입니다. 연약한 육신을 이길 수 있는지 없는지 연약한 육신을 이기는 방법은 무엇인지 또한 우리에게 알려 주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독수리가 마치 새끼를 강하게 훈련시키려고 낭떨어지에 떨어뜨리는 것 같은 강한 훈련과 냉정함을 보여주신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귀에게 시험받게 이끄십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마귀에게 시험받게 이끄실 수가 있는가! 하나님이 자신이 있으셨던 거예요. 왜냐하면 성령에 이끌리어 시험받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강한가 마귀의 꾐이 강한가 그리고 이세상의 왕이 강한가 전능하신 하나님이 강하신가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배고프고 연약할 때에 성령이 광야로 이끌려서 시험받으시게 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험에 통과하신 후 마3장에서 비로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이 공포하십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고 일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주님이 결정하고 계시는 거예요.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어떤 의미를 나타내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도 하나님의 때가 언제입니까라고 기다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때가 되기 위해 하나님의 테스트를 통과할 준비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한번 통과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예요. 우리 주변에서도 목회자와 사역자들이 많이 넘어지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다른 테스트가 항상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를 감당하셔야만 하는 과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 것일까요? 자신 스스로 부활이후를 준비를 해 놔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활했을 때에는 승천하는 것인데 이것은 제자들과 작별의 시간이 다가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십자가 사건 전에 어떤 준비를 해 놓아야만 하는 것인가요?
성경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수는 우리가 알고 있는데로 성경에서 12명의 제자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더 있을까요? 70명의 제자들도 전도파송하였다라고 나오지요. 더 있나요? 부활하신 후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다라고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인들도 포함하면 그 이상 되겠지만 그 500명과 그리고 70명의 제자들과 12명의 제자들의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동고동락을 했느냐 안했느냐?의 차이입니다. 막 10:28같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느냐 그렇지 않았느냐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더 가까운 3명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제자들은 바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이들은 다른 제자들과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요?
훈련방식에서의 차이가 있었어요. 전도의 훈련 말씀의 훈련 동고동락의 생활 모두 똑같은데 단 하나가 달랐습니다. 그것은 잠자는 시간까지도 쪼개서 기도훈련을 더 시켰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더 훈련 시키셔야 했을까요?
마가복음 9장에 예수님께서 3명의 제자들과 함께 변화산에서 기도하신 후 산에서 내려왔는데 나머지 제자들이 귀신들린 자를 고치지 못했던 사건이 발생해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귀신을 쫒아내신 후에 그들에 대답하십니다.
마가복음 9: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
예수님께서 3명의 제자들에게 기도훈련을 더 시키신 이유는 단지 그들을 편애해서가 아니라 부활이후 교회가 바로서기 위해서는 예수님 없이 엄청난 난제와 고난을 소화할만큼 핍박에도 굴하지 않을 교회를 수호하기 위한 기도의 제자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께서 귀신들린자를 고치실 때 3명의 제자들과 기도훈련을 하고 내려온 것을 조명하고 있어요. 예수님이 신이시기 때문에 신적능력으로 고쳐지는게 아니다라는 것을 성경은 말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공짜로 시험에서 이기는 것도 아니다 라는 거예요.
예수님이 그만큼 우리와 똑같이 육신의 한계를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를 더 자세하게 알려주는 성경말씀이 있지요. 십자가사건 바로 전에 겟세마네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변할정도로 간절히 기도하시는 모습이 있었기 때문에 그 십자가도 죽게 된 심정을 극복하고 감당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할때까지 예수님께서 준비해야 하는 필수 과제는 무엇이 되는 것입니까?
제자들의 기도훈련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도 똑같이 육체가 부활하게 될 때 그전에 반드시 준비해야되는 요소가 무엇 인가를 알려 주고 있어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마25장에서와 같이 기름등불. 바로 은혜의 기도입니다.
기도가 부족할 때 나타나는 증상들이 있습니다. 상처가 깊어져요. 그리고 시험을 이길 힘이 부족해집니다. 사람들과 관계도 악화됩니다.
성경은 3명의 제자 만큼이나 그리스도인도 왜 그만큼 기도가 필요한가?를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엡6:12 말씀처럼 이 세상이 마귀의 계획안에 있는 테스트 장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육신의 사람들은 이세상의 시간에 갇힌 테두리 앞만을 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하면 사는동안 윤택하게 잘 살 수 있을까? 거기까지 이를 수 있는 지혜를 가지고 삶을 살아가는 거예요. 성경은 이를 가리켜 이렇게 비유합니다. 눈은 있어도 자신의 앞가림을 하지 못하는 장님과도 같다. 그 테두리를 넘어서지는 못한다는 거예요.
잠언 16:9 이렇게 말씀하고 있어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크리스찬은 마음으로 계획하는 바가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기도할때에 내 계획이 아닌 주님의 방법으로 삶을 인도함 받는다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4문에는 이러한 질문과 답을 합니다.
4문: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그리스도는 마태복음 22장 말씀에서
이렇게 요약하여 가르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2
이 문답은 성경에서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의 질문에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였으므로 바리새인들 중에서 율법을 가장 많이 아는 똑똑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위해 했던 그 질문의 답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오늘날 이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도 대부분 지식적으로는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실천하지는 못해요.
그래서 실천하지 못하는 종교자들을 책망하십니다. 그런데 그 핵심을 잘 모르는 일반 사람들의 행위는 반대로 감싸시는 행동을 하시기 시작하십니다. 예를들어 간음하는 자, 술을 좋아하는자, 방탕한 사람, 남의 재산을 탈취하는 세리, 강도, 살인자들 이들의 행동은 감싸시는 거예요. 왜 그럴까요? 많이 모르기 때문에?
요한계시록 2:21에는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기회를 주시는 거예요. 어떤 기회. 회개할 기회... 그런데 말씀에서 음행을 회개하지 아니하였다라고 말씀합니다. 저는 음행하지 않았는데요. 음행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그리고 그 말씀을 따르는 것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것이 음행이다. 롯의 아내를 기억해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에 주저하여 뒤돌아본 순간 소금기둥이 되잖아요.
회개 때문입니다. 세례요한도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기 시작한 이유는 예수님이 사역하시기 전 바로 사람들을 회개시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회개하지 않으면 마음이 굳어져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아요. 그리고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심판이 되는 거예요. 성경은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어떤사람들에게는 은혜가 되고 구원이 되지만 막16:16처럼 어떤 사람들에게는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매우 중요한 키예요.
요13장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내가 너희를 씻기지 아니하면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되는 거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외출하고 나서 매일 씻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라고 말씀하세요. 일상생활에서도 외출할 때 많은 먼지가 나도록 창조하셨는데 하물며 영혼이 세상에 물들었는데 씻지 않을 수 있겠느냐? 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거듭남은 반드시 죄의 정화현상이 나타나야 합니다.
새사람이 되는 것. 그리고 속사람이 지속적으로 새롭게 되는 것 주님은 이것을 주님을 주인으로 여기는 자에게 시스템화 되게 하십니다.
요한복음 4장에는 사마리아 여인이 등장을 합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네 남편을 불러오라” 너에게 남편 5이 있었은데, 지금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지 않느냐?
우리는 이 대화에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이 여인이 이쁘다는 건가요? 수많은 남자가 들러 붙자나요? ^^
남편 다섯이 의미하는게 무엇일까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우리 자신보다 상대방이 나를 더 잘 알 때가 있어요. 언제인가요? 다투고 싸울 때 - 너 이렇자나? 너 이게 문제잖아? 맞는 말인데 되게 기분 나쁘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변명을 하지요.
그래서 그런게 아니라 ... 사실은 그냥 지나가려고 했는데 살짝 얼굴을 본거야.
문자.
그냥 안부전화한거야.
하트.
내가 보낸게 아니잖아.
다른사람에게도 이렇게 보낸데.
어제전화.
회사일로 전화온거야.
그제도 전화.
그제는 부장님에게 전화.
저번주에 전화온 것.
아. 잘못 걸었었대.
잘못걸었는데 10분이나 전화했네.
내가 원래 친절한 사람이잖아.
한도끝도 없어요.
공격하는자. 상황을 막는자.
우리 자신을 알아가는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해요. 놓쳐서 흘려버리거나 잊고 있거나 감춰져 있기 때문에 인식하고 있지 못하는게 의외로 많습니다.
성경은 이런 상황에서 “너의 남편을 불러 와봐”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남편 5이 될 때까지 기다려 주시는 거예요. 거기에 전혀 개입하지 않으시자나요? 오늘 내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 그 자유의지대로 놔두시잖아요. 마음껏 해봐.
마음껏 살았는데 남편 다섯과 남자친구 그게 계획이고 내 결정의 결과가 되는 거예요.
어떤 결과입니까?
오늘날 현실의 문제를 만들고 있는 바로 그 예전의 생각들. 계획들. 현 문제에 동기가 되는 생각들입니다.
기도응답이 안된다던지... 하나님이 멀게 느껴진다든지... 간혹 계신지 안계신지 헷갈려하기도하는 갈등들... 때로는 이 갈등들이 불순종으로 야기되기도 해요.
왜 이런 문제가 반복되어집니까? 집요하지요. ^^ 집요하지 않으면 우리 본성을 알아갈 수 없어요. 우리 자신을 알아가는데 1,2시간 가지고 되는 문제가 아니예요. 자신을 보고 비우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하는가!
이러한 문제가 반복되는 근본 원인은 우리가 아직 더 어려운 문제를 만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생에는 많은 문제들의 다양한 해결방법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만의 특별한 해결 Option들을 가지고 있어요.
일이 잘 안풀리거나 스트레스를 받거나 인간관계가 틀어지거나 새로운 계획을 시도할 때 행동하는 Option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TV가 될 수 있고, 영화 나 게임, 스포츠 그리고 술, 담배, 여행, 쇼핑 이사를 결정하는 것, 직장을 선택하는 것, 사업을 진행하는 것, 결혼하는 것등 많은 선택 사항이 있어요.
우리는 경험에 의해서 습관적으로 자신의 범주안에 있는 검증된 Option중에 하나를 초이스합니다.
그것을 합리적 방법이라 부릅니다. 그동안 자신을 설득해온 대단히 합리적인 방법이예요.
그런데 이러한 합리적인 방법이 우리의 기도응답을 이루지 못하게 한다는 사실이예요.
오직 믿음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데 자신의 옵션으로 대체하는 거예요. 숙련되고 검증된 자신의 방법이기 때문에.
어쩌면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예전에 보다쉽게 해결할 수 있었던 문제였는지도 몰라요. 이것이 현재 예전보다 더 복잡하고 어려워지게 변형된 형태가 되었다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아니라 나의 합리적인 Option을 매번 사용했기 때문에. 그래서 믿음의 축복의 범주안에 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실수로 누군가와 사이가 틀어졌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데 그 다음날 그 문제로 다른친구와도 관계가 또 틀어졌어요. 그런데 그 다음날 많이 사람이 나를 안좋게 보는 것 같아요. 소문이 난 거예요. 그런데 그 소문이 sns에 퍼져서 공격당하게 되고 이미지가 안좋아지게 됐어요. 하던 사업이나 회사에서 집중하기 힘들어요. 그래서 그만두게 되니까 경제적으로 어려워지게 됐어요. 그에 대한 스트레스로 과민반응이 일어나고 남자친구와도 싸우다 헤어지게 됐어요.
그러면서 모든 사람들이 내게서 등 돌리는 것 같이 느껴져요. 이 크리스찬은 어떤 선택을 할까요?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어려운 상황이 돼서야 하나님을 간절히 찾기 시작하게 됩니다.
잠언 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오랫동안 교회다니면서 신앙생활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는 것. 복잡한 상황에 대한 기도응답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 기도부탁을 해서 응답을 받긴했는데 자신 혼자만으로는 불가능한 것.
아직 많이 모르는 거예요. 자신의 드라이브 면허증이 아직 장롱 속에 감추어져 있어요.
내가 신앙의 참된 모범을 보이고 있는지 아니면 신앙인이 되기 위해 흉내 내고 있는 것인지 정확히 모르는 거예요. 내가 믿음 좋은 누구를 따라서 하는 것인지.
예수님은 부활하시기 전에 그래서 이 3명의 제자들을 더 훈련시키서야 했던 것입니다. 내가 부활할때 그때 있었던 일을 말해라. 그때가 되면 그들에게 도움이 될거야. 기도를 통한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앞서 말했던 시스템의 중요한 키입니다.
소요리문답에서는 은혜의 방편이 3가지 있다고 가르칩니다. 첫째는 말씀, 둘째는 성례, 셋째는 기도입니다. 말씀이 말씀이 되게 하는 것 그것은 바로 기도예요. 성례의 의미대로 살아가게 하는 것. 그것 또한 기도입니다. 단지 우리가 아직 많은 것을 경험하고 있지 못할 뿐입니다.
기도가 신앙생활에서 중요하다고 깨달은 우루시누스는 하이델베르크에서 마지막을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로 마무리하고 있어요. 의도적인 목적이 있었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일반적으로 중요한 것을 마지막에 장식하려는 것이 보편적입니다.
127문에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마귀와 연약한 우리의 육신은 끊임없이 우리를 공격하고 있다라는 것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3명의 제자에게 쉬지않고 기도 해야 해. 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마귀가 쉬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현재보다 더 어려운 문제를 만나게 될 때에야 비로소 그동안 자신의 경험적 옵션보다 믿음으로 주님의 방법을 따르게 되는 거예요. "주님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주님 본성이 부패한 죄인입니다. 나를 구원하소서." 호산나.
그래요. 구원받을 가능성이 이러한 죄인들에게 더 있는 거예요. 누가 주님을 붙잡는가. 누가 옷자락을 붙잡는가. 누가 땅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바라는가. 개가 땅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 것처럼 비천한 저에게 그 은혜를 베푸소서.
믿음의 직면을 회피하지 않고 그 믿음에 내 인생을 던지는 것...
그때서야 자신과 주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워요. 마치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것처럼 자신을 부인해야 된다는 거예요.
찬양중에 이런 가사 내용이 있습니다.
보소서 주님 나의 마음을 선한 것 하나 없습니다. 그러나 내모든 것 주께 드립니다. 사랑으로 안으시고 날 새롭게 하소서.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내아버지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내게 사랑을 가르치시고 주님의 마음으로 용서하게 하옵소서 주님의 성령으로 내게 채우사 주님의 길을 가게 하옵소서 주님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이 찬양의 가사가 우리들의 기도가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마음이 필요해요. 우리 마음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예요. 나를 새롭게 하셔서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주님 마음을 내게 주옵소서 내게 사랑을 한량없이 가르치셔서 주님의 그 한이 없는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게 하옵소서 주님의 성령으로 내게 채우셔서 주님의 길을 가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의 마음 내게 주옵소서.
요3서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영혼이 잘되기를 바랍니다. 우선순위가 그렇게 되기를 원해요.
우리의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게 되는 것은 주저하는 자신에게서 이제는 벗어나 믿음으로 과감히 자신의 결정을 던지는 것입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 오직 구주 예수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항상 가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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