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뜻을 행하는 성도들이 되십시오. (요일2:1-17) 김정국 목사
1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
사도요한이 요한 일서를 기록한
첫 번째 목적에 이어
①[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와 더불어 올바른 교제 가운데 있게 하기 위해서]
두 번째 목적을
②'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게 하는 것'이라 말씀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죄를 짓지 하지 않게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되고서도 반복적인 죄를 짓는 성도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이루심으로써 모든 율법에서 자유하게 되었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그와 같이 가르치는 자들을 멀리하라고 교훈합니다. (26절)
이처럼 당시에는 다른 교리를 적용하여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미명아래 구약의 율법을 폐기시키려고 하는 거짓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예전에 없던 계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에 이미 율법에 기록되어 있던 옛 계명임을 강조합니다.(7절)
7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즉 이 뜻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 “서로 사랑하라”는 그 계명만을 지키라는 뜻이 아니라, 모든 계명을 함축하고 있는 대표 계명임을 먼저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무작정 계명을 지키기 이전에 성령을 통해 먼저 그 의미를 깨닫고 행동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5,16절을 보면 이미 그들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세상의 자랑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였습니다.
15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그들은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옛 계명은 크게 신경 쓰지 않은 것 같습니다.(4절) 그런데 본문은 ‘새 계명’ 역시 ‘옛 계명’에 포함되어 있는 계명이라 말씀합니다. ‘새 계명’의 범위가 얼마나 광범위한지 알려 주려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외에는(그들 나름대로) 그들이 불법을 저질러 왔기 때문에 그와 같은 행동은 ‘새 계명’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처사라고 교훈하는 것입니다. ‘새 계명’이 ‘옛 계명’에서 왔다는 것을 이해하는 성도라면 그와 같은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레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그들은 ‘자랑하는 것이 “새 계명”과 어떤 관계가 있길래 그럴까!’ 생각하겠지만 성경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 자체가 불법을 행하는 것이라 경고하고 있습니다. 불법을 행하는 것이 ‘구원’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17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도록 '복음'과 ‘새언약’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이해를 시키고 있습니다.
이 세상도 이 세상에서 누리는 모든 행위도 지나가겠지만,
오직 주의 뜻을 행하는 자만이 심판에서 자유롭게 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정욕’을 풀이해서: 죄 되는 것임을 알려주는 지표가 바로 '율법'임을 계시를 통해 이해시키고 있습니다.
죄의 경계선을 넘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율법이라면 그리고 새 계명이 그것을 함축하면서 대표하는 법이라면 ‘새 계명’을 받은 자의 외모가 아니라 '내면의 자세'가 달라지는 능력임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롭게 된 몸과 영혼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요구가 마침내 이루지게 되는 것입니다. (롬8:4)
내면의 자세가 달라지는 능력이 되기 때문에 복음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바로 빛의 나타남으로 인한 행함이 드러나게 됩니다. (요일1:7,8)
이것은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와 능력입니다.
(눅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이와 같이 구원을 열망하는 자는 창조의 원형을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타락을 알기 전의 상태, 세상에 취하기 전의 상태을 이해해야 합니다)
(막10: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
(마태복음 19: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
이와 같이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자는
복음을 한 번도 듣지 못한 자와 마찬가지로
① ‘복음’에 대해서
② ‘죄’와 ‘회개’에 대해서
③ ‘그리스도’에 대해서
④ ‘구원’에 대해서 새롭게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직 종합적인 복음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이기에 이전과 같은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전혀 변화된 행동이 나타나지 않음)
바로 이것이 교회가 지속적으로 복음을 증거해야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교회는
① 무조건 ‘믿으라’만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② 단순히 ‘회개’만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원하시는 회개가 무엇인지’
③ 무조건 ‘구원’받았다고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상태’가 무엇인지
④ ‘세례’ 베푸는 것을 목적에 두는 것이 아니라 ‘성령 세례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사도 요한뿐만 아니라
베드로와 야고보와 유다 또한 한결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진리 안에 거하는 성도라는 것"입니다.(요일1:7)
7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
(요일2:6)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그렇다면 왜 다른 사도와는 달리
사도 바울은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증언하였을까요?
그것은 사도바울이 직접적으로 그런 메시지를 전한 것이 아니라 교리에 의한 해석이 그런 메시지가 들리도록 한 것입니다. 성경을 이해하려면 교리가 아니라 계시를 우선시 해야 합니다.
로마서를 보게 되면 사도 바울은 율법을 파기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굳게 세워 순종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롬3:31)
31“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그리고 '성령에 순종하는 자'에 한하여 결국 율법의 요구는 이루어진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롬8:4)
4“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오늘날은 본질적인 것보다 비본질적인 방식으로 접근하여 사람들을 현혹하는 시대입니다.
보다 자극적인 멘트나 선정적인 장면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면 그 지혜가 통하는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이와 같은 문제에 관하여 여러 관점을 제시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오늘날 기독교의 토론 자체만 가지고 본다면
① 십일조보다 연보가 맞다느니
② 간음은 이제 죄가 아니라느니
③ 동성애 또한 정치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느니
④ 유월절, 초막절, 장막절 등을 지켜야 한다느니
⑤ 모든 종교는 하나이고 그 안에서 결국 하나가 된다느니 하면서
사람들을 모아 세력을 만들고
이를 법제화하는데 이용하여 사회질서를 혼란시키는데 앞장서고 있는 상황을
우리가 너무나도 쉽게 볼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나라도 현재 간음에 대해서는 '죄'가 아니라고 이미 판정 하였으며 '동성애' 문제도 사회적 이슈로 인해 갈등이 빚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이와 같은 사회현상들이 왜 일어나는 지를 생각해보기에 앞서
기독교 역사를 통해 한 때 우리의 자랑이었던 유럽의 성지와 교회들이 왜 나이트클럽과 술집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지를 먼저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이 바울서신의 복음의 해석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자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정리'해 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왜 다른 사도와는 달리
사도 바울은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증언하였을까요? 라는 질문에 답변을 한다면
우선 바울이 구원이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논지를 설명함에 있어서
구원의 '행위'자체를 부정하고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로마서에서 불법을 행하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바울은 구원과 연결시켜 책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롬10:1)
그는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들에 대하여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음을 전하려 한 것입니다.
그들은 할례를 하지 않은 상태로 율법을 이해한 사람들이고 사회적 평판은 좋았습니다.
사회적 평판이 좋지 않은 사람들은 오히려 율법(할례)을 행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 따라서 사도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는
'행위'로 구원받는 다는 메시지를 전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운명론'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고자 함입니다.
(누가복음 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즉 '할례'의 '행위'만으로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들을 책망하기 위해 기록한 것입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롬2:26,27)
결국 바울은 로마서에서 성령에 순종함으로 ‘율법’을 이루는 방법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아니면 그 의를 이룰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성령이 아니면 그 요구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이해시키는 것입니다.
※ 그러나 기독교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 다는 의미를 강조하게 된 이유는
①‘할례’보다는 ‘세례’를 ‘세례’보다는 성령세례가 구원을 일으키는 능력임을 즉 나중 단계를 통하여 전 단계의 의미를 이해시키기는 방법을 사용하셨다는 것을 증명하는 과정 중에서 생긴 학자들 간의 오해가 넓어진 것뿐입니다.
② 또한 부패한 중세 기독교시대에 말씀과는 상관없는 '의식'이나 '면죄부 판매'등과 같은 행위를 비판하기 위하여 ‘행위’보다는 ‘믿음’을 강조하면서 생긴 오해입니다.
즉 구원이 하나님의 법의 순종유무와 상관없다는 것을 피력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구원과는 상관없는 중세의 잘못된 행위 자체를 비판하기 위해서' 그와 같은 반박을 하게 된 것입니다.
어쨌든 예정론을 정확히 이해하고 전달하는 교회라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목회자로부터 성도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목회자의 영적 상태에 따라 성도들이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지예정과 같이 ‘코람데오’(하나님 앞에서)의 자세로 사는 것도 중요하고 예정과 같이 믿음의 확신가운데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우선시 될 사항은 ‘성령님께 순종해야 '구원'에 이른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8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8절에서는 ‘새 계명’에 의해 어둠이 지나가고 참 (진리인) 빛이 비취었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①이것은 먼저 ‘새롭게 되는 상태에 도달해야만, “어둠이 지나가고 참 빛이 비취었다”는 의미의 실현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지식이 아니라 지혜있는 자가 되기를 ...)
②‘어둠이 지나가고 참 빛이 비취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어둠이
과거로 이미 물러갔음을 의미하고
새로운 빛에 의해 진리의 영역에서 새로운 사귐이 시작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서신의 첫 번째 목적)
③즉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 그런 의미의 삶까지를 견인한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에 대해 몸소 본을 보이셨다는 것은 계명을 깨닫든지 (아직 어리다면)본을 따르든지 어떤 것을 선택하든지 결국 그 목적이 이루어지게끔 하신다는 뜻을 보이신 입니다. (2절)
ⓐ결국 계명을 다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주의 뜻을 이루는 사람이 되며
ⓑ비록 그리스도를 직접 보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계명을 이해하여(20절) 순종한다면 주의 뜻을 이루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5절)
따라서 '구원'은 진리되신 그리스도의 말씀의 순종에 있는 것입니다.
{순종을 일으키는 힘이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에 있으며 그리스도와 멀어질수록(세상과 가까워질수록 혹은 어둠에 잠식될수록) 불순종에 이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5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즉 본을 따르는 사람이나 계명에 순종하는 사람이나 결국 주의 뜻에 순종하는 성도들로 완성되어지는 것인데
사도 요한이 이와 같은 논리를 편 것은
거룩의 모양만을 갖춘 성도들에게
회개의 열매를 맺기 위한 깨우침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 열매는 옛 율법(서로 사랑하라)을 행함입니다.
‘옛 율법’이라 함은 예전부터 있었던 율법이고
‘새 율법’이라 함은 성령으로 인해 새 사람이 되었으니
옛 율법(과거)이 의미하는 바를 인식하여
‘보복’과 ‘차별’을 뛰어넘는 온전한 사랑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옛 율법(종)이 원하는 그 이상을 행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전과 다른 ‘새 율법’의 의미가 되는 것이며,
성경은 이를 가리켜 '종'이 아니라 '자녀'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불법을 저지르는 상황을 보고 다음과 같이 붓을 들게 된 것입니다.
9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10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11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겉모습은 교회의 성도이지만 실상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자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전해졌으면 과거의 삶을 끝내버려야지 아직까지 어둠에 사로잡혀 불법을 행한다면 “어찌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겠느냐”며 반문을 하는 것입니다. (9-10절)
그들이 아직도 그와 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은 단연코 어둠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또한 어둠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은 그들이 이 세상을 사랑한 연고 때문입니다. (15절)
15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세례나 연륜과도 상관없이 세상에 물들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둠의 세력으로 인해 영적인 눈이 멀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사도 요한이나 베드로나 야고보나 유다와는 다른 주장을 펼친것이 아니라 결국은 그들이 한 가지 공통된 주장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캄캄한 어둠속에서 빛이신 아들 예수와 성령을 보내신 것은 '오직 주의 뜻을 행하는 자녀들을 부르시기 위해서' 라는 것입니다.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