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가 좋다고 그 과정까지 옳은 것은 아닙니다. (약2:1-7)
약2: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야고보서 2장은 그리스도인의 차별에 대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 가운데 이미 차별하는 일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주제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차별대우하지 않아야 할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유대교는 이스라엘을 위한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민족으로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을 멀리하며 그들이 먹는 음식을 멀리하고 그들의 종교와 문화를 멀리해야 하는 종교이므로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구분 짓는 차별의 종교라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언약을 파기하고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그 죄악은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충분한 기회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께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이를 가리켜 성경은 기록하기를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들포도가 맺히게 되는 결과가 나오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사5:2)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주신 것인데 이스라엘은 그것을 죄의 열매로 바꾸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제 구원의 기회를 세상에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은총의 혜택을 이방인에게도 동등하게 나누어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아래 모두가 평등한 조건으로 하나님의 자녀의 혜택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빈부를 막론하고 남녀의 구분 없이 병든 자나 약한 자나 죄인이나 그가 어떤 사람이든지 모두 다 자기의 죄를 자복하여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깨우침을 받을 수 있는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예전에는 축복이 하나님의 물질로 임했지만 이제는 가난한 자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어 예수그리스도안에서 얼마든지 부요한 자가 될 수 있음을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우리가 알았던 모든 것이 지나갔으며 이제는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고후5:17)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새로운 시대의 청사진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반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토록 원하시고 원하시던 극상품의 포도나무 열매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룩해지고 더 온전해 지며 희미했던 것이 뚜렷해지므로 어느 길을 가야 할지 더욱 명확하게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유대교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선포했으면서도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빈부를 기준으로 차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로 인하여 시험에 당하였습니다.
이것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의 율법의 시대에서 은혜의 시대로 바뀌었다는 것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던 까닭입니다.
그래서 부유한 자가 오면 상석을 준비하고 가난한 자가 오면 말석을 주어 여전히 외모를 차별하여 사회적인 방식을 교회에까지 접목시켰습니다.
2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4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그리스도안에서 차별을 하였다는 것은 악한 생각으로 이미 판단한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선한 범주의 영역에서 벗어나 악한 범주의 틀로 넘어가 차별을 감행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면 극상품의 열매 즉, 선한 열매가 나타나야 하는데 현재는 그렇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성령께서 야고보를 통하여 바로잡으시려 하시는 것입니다.
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 하셨느냐
가난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있으리라는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복음의 효력이 이미 발생하고 있음에도 아직도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리스도안에서 차별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이가 공평하게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6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7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성경은 그들이 부자가 되기까지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소유하였기 때문에 보다 쉽게 부자가 되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들의 지위가 법정에서도 상당한 위력으로 작용한 것 같습니다. 그들은 사회에서 힘이 있습니다. 사회에서는 그 힘으로 격차를 더 벌여 보다 나은 삶을 영위 할 수도 있습니다. 부의 힘이 레벨을 만드는데 이것은 부자들이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권리입니다. 비록 교회에서는 평등을 강요한다 할지라도 사회에서는 그들보다 월등히 높은 위치에 있는 것이 바로 현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 외식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보다 있는 모습그대로 그들의 레벨에 따라 교제를 나누게 된 것 같습니다. 군대에서 장교와 사병들이 함께 식사하지 않듯 사장과 직원의 위치가 다르듯 예배 몇 시간 후면 다시 지위가 갈리게 될 텐데 굳이 그렇게 까지 해야 할까 하는 생각도 들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사회에서 위정자들에게 복종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교회가 사회의 논리에 흡수되어서는 안된다고 말씀합니다. 즉 현실의 힘이 강하다고 해서 내세의 힘을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현실의 힘대로 교회가 따라가게 된다면 교회는 세속화가 될 것입니다. 교회를 통하여 세상이 바뀌어야 하는데 세상에서 통용되는 방식이 오히려 교회를 흡수해 버리는 상황으로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회적 상황이 교회적 상황을 이끌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마인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러한 마인드가 보편화 되면 교회가 변질되어 버릴 것입니다.
과거 한국교회에서는 신사참배를 강요받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 한국교회는 철저히 저항하지 않고 타협하여 신사참배 찬성 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옳지 않은 일이지만 저항을 하게 되면 많은 목회 지도자들의 목숨이 위태롭고 교회는 흩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힘들게 결정한 것인데 이 결정에 반대를 한 목회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결정이 옳지 않은 일이라 생각하여 저항하였습니다. 그 대가로 그들은 감옥에서 가혹한 고문을 당하거나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들은 점점 잊혀져 갔고 또는 사라져 갔습니다.
그렇지만 신사참배를 찬성한 교단과 교회는 그 사이 흩어진 성도들을 불러 모음으로 비상할 만한 성장을 이루게 되었고 마침내 교세와 교회는 큰 비약으로 명실상부한 성장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한국교회에 아이러니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지요. 어려움과 위기상황이 온다고 할지라도 잠시 굴복하거나 타협하여 다시 회개하면 위대한 부흥은 곧 현실로 다가온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역사였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는 그렇게 성장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성장은 사회적인 마인드입니다. 이것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교회 지도자들을 통하여 바이러스가 이미 교회에 침투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회개하면 모든 것이 축복으로 바뀌기 때문에 자신의 목적을 위해 회개를 적절히 사용하면 이익은 이익대로 최대한 얻으면서도 ‘구원’의 선물은 변하지 않아 세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면서도 안락한 삶을 보장받습니다. 가끔 어떤 말씀이 성도들을 괴롭힐지라도 교리는 절대적으로 구원을 약속하기 때문에 서서히 변질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지만 세상이 만든 교리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그 불완전의 틈새를 뚫고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을 사로잡아 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마인드가 교회에 침투하게 되면 교회는 약해지고 미래의 상황 또한 그 각본에 따라 지배받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하면 끝나는 일인데 뭘 그리 마음에 담아 두느냐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러한 사상과 정신이 후손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없을까요? 오늘날의 후손들은 그런 마인드 안에서 오히려 편안함을 느끼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확실한 구원이라는 보험에 회개 찬스를 사용함으로 세상 사람들보다 보다 더 안전하고 윤택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지 않은 삶이 어리석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은 사회적 마인드에서 출발했고 한때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실수하고 잘못했던 부분들인데 결과가 좋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대로 답습한 것입니다. 성공으로 과정을 이기고 현실이 이를 증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가 좋다고 그 과정까지 옳은 것은 아닙니다.